명화작품

붉은방 _ 앙리 마티스

아트지인 2025. 4. 6. 21:45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

앙리 마티스 프랑스 북부 르 샤토 캉브레시에서 출생한 프랑스의 화가이며

에콜 드 보자르에서 귀스타브 모로에게 수업을 받았다.

붉은 방은 마티스 특유의 강렬한 색채와 대담한 평면처리가 돋보인 야수파의 걸작이다.

시선을 사로잡는 강한 색채감 음영이나 명암을 무시하고 과감히 평면감을 표현함으로써 마티스의 대담성을 엿볼 수 있다. 1941년 마티스는 대수술을 받고 병을 앓으면서도 병상위에서마저 붓 대신 가위를 들고 색종이를 오려 붙이며 숱한 작품을 남겼다는 일화는 예술에 관한 마티스의 열정과 천재성을 전해준다.


식탁을 차리는 여성의 행복한 기운이 그녀를 둘러싼 주변에 넘실거리는 즐거움을 주듯

행복의 기운이 가득한 작품으로 보여진다

프랑스의 화가.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활동한 중요 예술가 중 한명이며, 20세기를 주름잡은 야수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색채와 형태의 조합을 통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며, 포스트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 운동을 거쳐 초대현실주의를 이끈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1869년 12월 31일 프랑스 북부의 르샤토캄프레시스에서 출생하였다.

22세 때 파리로 가 법학을 전공하였으나, 병에 걸려 요양을 하는 동안 어머니가 사주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진로를 바꾼다. 그의 아버지는 생계가 불확실한 화가가 되는 것에 반대했지만, 끝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림을 배웠다.

1892년 파리의 장식 미술학교에 적을 두고, 미술학교 수험준비를 하면서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부그로의 지도를 받았으나 그 아카데미의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어 루브르 미술관에서 모사(模寫) 등을 하는 사이 귀스타브 모로의 눈에 띄어 1893년 파리 보자르의 그가 가르치는 교실로 입학하였다.

1897년 아멜리에 노 엘리 파 레이어와 만난 뒤 이듬해인 1898년에 부부가 되었다. 결혼 당시 마티스에게는 이미 4살 딸이 있었다.

그 후 1900년 이후에는 세잔풍(風)을 도입하여 극도로 구성적인 포름과 어두운 색조로 전향하였으나, 1904년 시냐크, 크로스와 함께 생트로페에 체재하게 됨으로써 신인상파풍을 짙게 받아들였다.

이 새로운 교우관계가 이듬해에 시작된 야수파(포비즘) 운동의 강렬한 색채의 폭발로 나타나게 되었다. 드랭, 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竝列)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1908년경에는 강한 색채 효과를 억제하는 한편, 새로이 전개된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입체주의(큐비즘)의 방향으로 눈을 돌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10년의 뮌헨 ‘근동미술전’의 인상, 1911~1913년 2번에 걸친 모로코 여행으로 왕년의 포브 시대와 다른 장식적인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여 특히 아라베스크나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이나 순수색의 병치(竝置)로 독특한 작풍을 창조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목련꽃을 든 오달리스크》가 있다. 티치아노처럼 그도 나이가 들면서 더 왕성한 활동을 했다. 더 붓을 들 수 없어지자 색종이를 오려서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8년 병색이 짙은 나이에 샤펠 로자이르 드 뱅스 예배당 벽화 및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스스로 맡게 되었다.[1] 간병원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나이가 너무 들었고 병색이 있기에 너무 위험하다고 말렸음에도 마티스는 이게 내 최후 작품이라고 힘을 다했다. 그리고 1952년 드디어 이 작업을 끝내고 쓰러졌다. 작업을 모두 다하고 "내 마지막 작품이 이로서 끝났다...."라고 지인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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